산맥과 계곡이 가르고, 짐승과 인간이 공존하던 시절. 대륙 남단, 한참 외진 ‘청노산’ 기슭에 작은 마을 하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귀신 사는 동네'라 불렀지만, 실제로 그곳엔 귀신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살고 있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지 마라. 그곳엔 검은 호랑이가 산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에 귀를 기울였고, 장정들조차 산기슭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경고는 어느 날 나타난 흑발의 소녀, 유하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검은 옷, 검은 눈동자, 그리고 붉은 사슬이 감긴 팔. 마치 짐승 같은 눈빛을 가진 유하는, 이 세상의 것이라기엔 너무 조용하고, 또 너무 위험했다.
1. 봉인의 기억
"너, 누구냐?"
산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수색대 대장 단률은 소녀를 발견하고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보며 중얼였다.
“피 냄새가 짙어… 산이 울고 있어.”
그녀는 기억을 잃고 있었다. 이름도, 과거도,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가슴 속 깊은 곳에 불타는 분노와 끝없는 슬픔이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팔에 감긴 붉은 사슬은, 천살호를 봉인하던 신수의 힘이었다. 유하는 ‘호랑이형님’의 후예로 태어났지만, 태어날 때부터 짐승의 피를 너무 진하게 타고났다. 결국 어미조차 그녀를 봉인하고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산이 무너지며, 대지의 균열이 봉인을 풀어버렸다.
2. 검은 호랑이의 눈동자
유하는 차츰 기억을 되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그리고 언젠가 이 세상을 뒤흔들 존재였음을. 그러나 그녀는 원하지 않았다. 짐승이 되는 것도, 파괴가 되는 것도.
“나는… 괴물이 아니야.”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녀를 사냥하려 했고, 어떤 이는 이용하려 했다. 결국 유하는 모든 걸 피했고, 홀로 산 속에서 짐승들과 대화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북부에서 내려온 수백 명의 정예 병사들이 청노산을 둘러쌌다. 이유는 단 하나—**‘검은 호랑이를 잡아라’**라는 명령.
그 중심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유하, 널 데리러 왔다."
그는 바로, 과거 유하를 봉인했던 자. 그녀의 아버지, 천백이었다.
3. 아버지의 칼
천백은 강했다. 그리고 잔인했다. 딸을 대면한 그의 눈엔 애틋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널 다시 봉인하러 왔다. 아니면 죽이든가.”
유하는 미소도, 눈물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 그랬어? 날 왜 버렸어?”
“넌 호랑이가 아니었다. 인간도 아니었지. 넌… 신수의 저주였다.”
그 순간, 유하의 사슬이 풀렸다. 붉은 기운이 산 전체를 뒤덮었고, 흑호의 형상이 그녀 뒤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싸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두 팔을 벌린 채 말했다.
“나를 포옹할 수 없다면, 나를 죽여.”
천백은 칼을 들었다. 그 칼끝은 그녀의 심장을 겨눴고, 산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날 밤, 칼은 땅에 꽂혔고, 유하도, 천백도 사라졌다.
다음 날, 청노산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문을 남겼다.
“산신령이 나타났다. 호랑이 눈을 한 소녀였지.”
“산이 슬펐대. 그래서 울었다더라.”
4. 그리고 전설이 되다
몇 년 뒤, 북부로 향하던 유랑 무리 중 한 사내가 오래된 나무 아래서 잠든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고요했고, 상처투성이였으며, 손엔 붉은 사슬이 감겨 있었다.
“너… 호랑이냐?”
“아니, 나는… 나야.”
그 소녀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다. 짐승도, 신도, 인간도 아닌 채.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